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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현장에서 처음으로 어떤 묘한 정적을 의식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용수가 동작을 멈추고, 안무가가 말없이 팔을 들어 올리던 그 짧은 틈. 소리 하나 없는데도 공간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된 이유를 곱씹다 보면, 공연예술이 단순히 동작의 연결이 아니라 ‘멈춤’의 질감까지 품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며칠 전에는 한 창작자가 “어떤 움직임은 오히려 정적에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순간 그 말이 공연에서 내가 느껴왔던 이상한 울림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리듬이 떨어진 뒤 다시 생겨나기까지의 ‘사이’, 배우가 다음 동작을 찾기 위해 단 1초 멈추는 순간의 긴장감, 조명이 꺼지는 직전의 미세한 시간. 이런 틈새의 감각이 동작예술의 깊이를 만들고, 움직임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무대 뒤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면, 몸짓의 변화는 언제나 크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어떤 날은 발목 각도를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 장면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지고, 또 어떤 날은 호흡의 길이를 미세하게 조정해 전체 흐름이 더 자연스러워진다. 이런 조정들은 연습 과정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동작예술에 오래 관심을 두게 된 이유도 어쩌면 이런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 느끼는 희한한 쾌감 때문인지 모른다.

최근 보았던 한 실험적 공연에서는 무대 공간을 거의 비워둔 채, 배우가 움직이지 않는 장면이 20초 가까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연출 기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객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배우의 고개 방향, 손끝의 힘, 체중이 살짝 이동하는 지점 등 평소에는 간과하는 세부 요소들이 ‘정적’을 매개로 더 선명해지는 경험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동료 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 장면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르면서도 공통된 긴장감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창작자 인터뷰를 하다 보면, 많은 이들이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을 surprisingly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어떤 동작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만, 때로는 즉흥적인 멈춤이나 실수에서 장면의 전환점이 나타난다. 그 우연의 순간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갈 정도로 강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창작 현장에서는 완벽한 계획보다 ‘열어 둔 여지’를 훨씬 소중하게 다루는 듯하다.

동작예술을 기록할 때 나는 종종 무대 위의 움직임보다 그 뒤에 존재하는 미세한 결정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창작자는 자신의 동작이 지나치게 계산돼 있다고 말하며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멈춤을 실험한다. 또 어떤 창작자는 무대의 소리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의 압을 낮추고, 그에 따라 전체 동작의 결이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관객이 직접적으로 인식하진 못하지만 공연 전체의 감정선을 지탱하는 핵심적 기반이 된다.

살토모탈 컬쳐룸에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공연예술과 동작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늘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적의 숨결,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의 틈, 창작자가 손끝을 조금 바꾸기 위해 들이는 치열한 정성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런 순간들을 하나씩 포착해두면, 공연예술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섬세한 언어인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앞으로도 무대 뒤의 정적과 움직임 사이의 보이지 않는 흐름들을 계속 관찰해볼 생각이다. 그 흐름 속에서 공연예술의 본질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황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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